조선 제 19대 임금 숙종, 둘째부인 인현왕후, 셋째부인 인원왕후 명릉(明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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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19대 임금 숙종, 둘째부인 인현왕후, 셋째부인 인원왕후 명릉(明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8.10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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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조선 제 19대 임금 숙종은 세명의 정부인 과 두명의 후궁을 거느렸다.

두명의 후궁 소생이 20대 임금 경종과 21대 임금 영조가 되는 요즘 보기드문 희귀한 족보가 만들어진다.

명릉은 조선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숙종의 첫부인 인경왕후는 익릉에 모셔졌고 훗날 20대 임금이 되는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는 대빈묘에 묻혔다.

뒤에 21대 임금에 오르는 영조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는 소령원에 모셨다.

명릉이야기

명릉전경

명릉은 같은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고 서로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으로 능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고 왼쪽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향로와 어로 양 옆에는 변로를 깔아 놓아 겉으로 봤을 때 4개의 길로 보인다. 비각 안에는 2개의 능표석이 있는데, 하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표석이고 또 하나는 인원왕후의 능표석이다.

능침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했다. 특히 숙종의 명으로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낮추기 위해 석물치수를 줄였다. 대표적으로 8각 장명등이 4각 장명등으로 바꿨다.

능의 역사
명릉 인현왕후 망주석

1701년(숙종 27년)에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릉에 제일 처음으로 능을 조성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을 공사할 때 허우(虛右, 오른쪽 자리를 비우게 함)제도로 공사해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이후 1720년(숙종 45년)에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의 능 옆으로 능을 조성해 쌍릉의 형식을 이뤘다.

명릉 인원왕후 능침곡장,석양,석호

명릉을 조성한지 37년이 지난 후 1757년(영조 33년)에 인원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는 생전에 명릉에서 400여보 떨어진 곳에 미리 묻힐 자리를 정했으나, 영조는 새로 산릉공사를 해야 하는 것(당시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공사하고 있던 상황)을 염려해 명릉 서쪽 언덕에 자리를 선정하고 필요한 인력과 국고를 줄여 산릉공사의 부담을 덜었다.

쌀 300석 짜리 명당에 얽힌 설화

사료가 밝히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숙종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연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묘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숙종(肅宗) 이야기
명릉 홍살문

숙종(1661년~1720)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아들로 1661년(현종 2년)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나, 1667년(현종 8년)에 왕세자로 책봉됐고 1674년에 1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4살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총명하고 영특해 수렴청정을 받지 않았다.

재위기간 동안 1680년에 경신환국(유악(油幄) 사건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 1689년에 기사환국(경종 탄생으로 원자칭호 문제로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 교체), 1694년에 갑술환국(인현왕후 복위 문제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으로 서인과 남인 정권을 이용해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다.

전국적인 대동법(大同法) 실시와 양전(量田)의 실시, 화폐주전을 통용하는 등 경제정책에 전력을 다했다. 1712년(숙종 38년)에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 시켰고, 2대 정종의 묘호 추숭과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 '선원록' 작성 등 왕실의 기강을 확립했다. 그 후 1720년(숙종 45년)에 경덕궁 융복전에서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仁顯王后) 이야기

숙종의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본관이 여흥인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로 1667년(현종 8)에 반송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숙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81년(숙종 7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당시 조정은 당파간의 분쟁이 한참이었는데, 왕실의 여인들이 중심이 되어 암투가 벌어졌던 상황으로, 1689년(숙종 15년)에 숙종의 후궁 장씨가 왕자(경종)를 낳자 원자(元子) 책봉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이 있었다. 이 일로 기사환국이 발생돼 남인 정권이 들어서자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돼 출궁됐다.

하지만 1694년(숙종 20년)에 복위운동문제로 갑술환국이 발생되면서 서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자 왕비로 복위됐다.

한글소설 사씨남정기의 배경

이 때 나온 소설이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라는 소설이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이 그의 말년에 유배지에서 쓴 한글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사씨는 성품이 곱고 후덕한 인물이지만, 남편 유연수의 교활한 첩 교씨의 모함을 받아 결국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유연수의 첩 교씨가 아들을 낳은 후 정실부인이 되기 위해 갖은 계략을 꾸미며 그녀를 몰아낸 것이다.

소설은 한림학사 유연수의 처 사씨의 바른 품행과 그녀를 시기하는 악한 첩 교씨가 그녀를 음해하기 위해 꾸미는 악행들, 그리고 소설 끝에 가서는 누명을 썼던 사씨가 귀양지에서 돌아오고 악행이 들통난 교씨는 처형당하는 권선징악 구조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는 숙종의 인현왕후 폐위 사건을 모델로 당대의 현실을 소설화한 것으로 서인이었던 김만중은 이 소설로 인현왕후를 폐위하는 것이 부당함을 밝히는 의도로 지었으나, 끝내 인현왕후가 복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701년(숙종 27년)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가 드러나 무고의 옥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인원왕후(仁元王后) 이야기
명릉 인원왕후 장명등

숙종의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1687~1757)는 본관이 경주인 경은부원군 김주신과 가림부부인 조씨의 딸로 1687년(숙종 13년)에 순화방 사저 양정재에서 태어났다.

숙종의 두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702년(숙종 28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왕비로 있을 때 천연두와 홍역을 앓아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1720년에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됐으며, 1721년(경종 1년)에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시키고 양자로 입적했다.

경종 연간에 있었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인 신축임인옥사(신임옥사)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은 영조를 끝까지 보호해줬으며,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됐다. 그 후 1757년(영조 33년)에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 궁중생활기 선군유사,선비유사 남겨

인원왕후가 궁중 생활을 기록하여 엮은 '선군유사(先君遺事)'와 '선비유사(先비遺事)'가 세간에 소개됐다.

선군유사는 아버지에 관한 회상, 선비유사는 어머니에 관한 회상을 말한다. '선비유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궁 안에 머무르시면 새벽에 일어나시어 문 밖에 오셔서 내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시고 내가 청하여 “누운 자리에 들어오소서.” 하면 “황송 하노라.” 사양하시고, 내가 청하여 자리를 한 가지로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머뭇거려 사양하셨다.

이 두 권의 기록에서 인원왕후는 궁에 들어와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과, 중전으로서 부모님과 사사로운 정을 나눌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선군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15세에 이르되 항상 무릎에 두시고 이마를 어루만져 잠깐도 버려두지 않으시더니 내가 이 지위에 오르자 …… 내가 그 좌석이 너무 멀기로 민망해 가까이 옮겨가고자 하면 아버지께서는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사양하셔서 내가 감히 사사로운 정을 펴지 못했다.

훗날 인원왕후는 이 기록을 친정으로 보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했다 한다. 이 두 권의 문집과 더불어 발견된 세 권의 문집은 인원왕후가 노년에 썼을 가능성이 높으며, 단아하고도 기품 있는 글솜씨가 당시 그녀의 학문과 독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제19대 숙종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익릉(翼陵)

능의 구성

익릉 능침

익릉은 조선 19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의 단릉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했다.

익릉의 정자각은 서오릉 내에 있는 정자각 중에서 유일하게 익랑이 설치되어 있는 정자각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의 동자석주 상단부에 12간지를 글자로 새겨 놓았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했고, 대부분의 석물 조각은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능의 역사

익릉 정자각

1680년(숙종 6년)에 인경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681년(숙종 7년)에 고양 경릉(敬陵) 경내인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인경왕후(仁敬王后) 이야기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1661~1680)는 본관이 광산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와 서원부부인 한씨의 딸로 1661년(현종 2년)에 태어났다.

1670년(현종 11년)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고, 1674년에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숙종 사이에서는 두 공주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고, 1680년(숙종 6년)에 천연두로 경덕궁 회상전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제20대 경종 사친 옥산부대빈 장씨 대빈묘(大嬪墓)

묘의 구성

대빈묘 후경

대빈묘는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사친인 옥산부대빈(희빈) 장씨의 묘이다.

대빈묘는 후궁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했다.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혼유석, 묘표석을 배치했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곡장을 둘렀다.

묘표석에는 ‘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유명조선국 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묘의 역사

대빈묘 비석

1701년(숙종 27년)에 희빈 장씨가 세상을 떠나(자진(自盡)),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년)에 양주 인장리(현 구리시 인창동)에 묘를 조성했다.

그러나 묘소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1719년(숙종 45년)에 광주 진해촌(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으로 이장했다. 이후 1969년에 묘소를 서오릉 경내로 옮겼다.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 이야기

옥산부대빈 장씨(1659~1701)는 본관이 인동인 옥산부원군 장형과 파산부부인 윤씨의 딸로 1659년(효종 10년)에 태어났다.

숙종대의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 조씨를 모시는 궁녀로 입궁해, 숙종의 총애를 받아 1686년(숙종 12년)에 숙원(淑媛, 내명부 종4품 후궁)이 됐다. 소의(昭儀)의 품계에서 1688년(숙종 14년)에 숙종의 첫 아들 윤(경종)을 낳아 희빈이 됐다.

대빈묘 장명등

숙종은 희빈이 낳은 왕자를 원자(元子)로 책봉한다는 뜻을 밝히자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은 강력하게 반대했고, 이 일로 인해 기사환국이 발생돼 남인 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숙종은 환국 이후 인현왕후 민씨를 왕비의 자리에 폐위하고 희빈을 왕비로 책봉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년)에 인현왕후 복위 운동과 숙빈 최씨 독살사건이 발단이 되면서 갑술환국이 발생돼 서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게 됐다.

이 사건으로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됐다. 그 후 희빈은 1701년(숙종 27년)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를 무고한 혐의(무고의 옥)가 밝혀져 자진했다. 이후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1722년(경종 2년)에 왕의 사친으로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사당의 이름은 대빈궁, 묘소의 이름을 대빈묘라 했다.

제21대 영조 사친 숙빈 최씨 소령원(昭寧園)

원의 구성

소령원 석물

소령원은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1대 영조의 사친인 숙빈 최씨의 원이다.

원의 구성은 왕릉의 형식과 비슷하게 조성됐다.
소령원 입구에는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세운 신도비각이 있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시묘살이를 했던 터가 남아 있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있다. 비각은 두 개가 있는데 1비는 1744년(영조 20년)에 소령묘(昭寧墓)로 추존한 비, 2비는 1753년(영조 29년)에 소령원(昭寧園)으로 추존한 비이다.

원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했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상석, 묘표석, 석양과 석호 1쌍이 배치돼 있다. 석마 옆에는 중배설석이라는 석물이 있으며, 묘표석은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 세운 표석이다.

원의 역사

1718년(숙종 44년)에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나 처음 숙빈묘를 조성했다. 이후 영조가 즉위한 후 1725년(영조 1년)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1744년(영조 20년)에 묘의 이름을 소령묘라 했다. 그 후 1753년(영조 29년)에 왕의 사친 추존제도가 성립된 후에 원으로 격상시켜 이름을 소령원이라 불렀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 이야기

소령원 신도비

숙빈 최씨(1670~1718)는 본관이 해주인 증 영의정 최효원과 남양 홍씨의 딸로 1670년(현종 11년)에 태어났다.

1676년(숙종 2년)에 7세의 나이로 궁녀로 입궁했고, 1693년(숙종 19년)에 숙종의 후궁이 되어 숙원(淑媛)이 됐다. 숙의(淑儀)의 품계에서 1694년(숙종 20년)에 영조를 낳았으며, 귀인(貴人)을 거쳐 1699년(숙종 25년)에 숙빈이 됐다.

1701년(숙종 27년)에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난 후 희빈 장씨를 자진시킨 무고의 옥을 고변(희빈 장씨가 왕후를 무고한 일)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1718년(숙종 44년)에 창의궁 사저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1753년(영조 29년)에 왕의 사친으로 추존돼 시호를 화경(和敬), 궁호를 육상궁(毓祥宮), 원호를 소령원으로 추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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