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인조 · 인열왕후 장릉(長陵) 인조 계비 장렬왕후 휘릉(徽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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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인조 · 인열왕후 장릉(長陵) 인조 계비 장렬왕후 휘릉(徽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8.0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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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식이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있었다가 1731년(영조 7년)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면서 합장릉으로 조성했다.

                    장릉  혼유석

특히 옛 장릉의 석물과 천장하면서 다시 세운 석물이 같이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재실, 금천교, 홍살문,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향로와 어로는 숙종의 명릉처럼 양 옆에 변로를 깔았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했고 혼유석은 합장릉의 형태로 2좌를 두었다. 

      모란과 연꽃을 새긴 장릉 병풍석 인석

특히 천장하면서 병풍석을 둘렀는데, 병풍석에는 기존의 구름문양과 십이지신상을 대신해 모란꽃과 연꽃 문양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오른쪽 사진 참조>

능의 역사

1635년(인조 13년)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636년에 파주 운천리에 능을 조성했다.

이때 인조는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공사했다. 이후 1649년(인조 27년)에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게 된다. 그러나 장릉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에 무리를 이루며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변이 계속되자 1731년(영조 7년)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했다.

인조(仁祖) 이야기

                        장릉 곡장

인조(1595~1649)는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첫째 아들로 1595년(선조 28년)에 임진왜란으로 피란 중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607년(선조 40년)에 능양도정이 됐으며 이후 능양군에 봉해졌다.

1623년에 서인 정권과 함께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즉위 초에 반정공신책록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수습했으나, 당시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성장하는 시기를 인식하지 못해 척화파와 주화파가 대립하기도 했다.

남한산성 파천, 삼전도 수난

결국 1627년(인조 5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다시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파천했으나 청나라에 항복해 삼전도에서 수난을 당했다.

그 후 1649년(인조 27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후 묘호를 열조(烈祖)라 했으나, 최종적으로 묘호를 인조라 했다.

인열왕후(仁烈王后) 이야기

인열왕후 한씨(1594~1635)는 본관이 청주인 서평부원군 한준겸과 회산부부인 황씨의 딸로 1594년(선조 27년)에 강원 원주 내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광해군 2년)에 능양군과 가례를 올려 청성현부인에 봉해졌다.1623년에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인조 사이에서 6남 1녀를 낳았다. 1635년(인조 13년)에 창경궁 여휘당 산실청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휘릉(徽陵)

       휘릉 능침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단릉 형식으로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5개로 배치했다. 조선 전기 왕릉(건원릉~헌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의 영릉 이후에는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됐다.<오른쪽 아래사진>

     다섯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는 휘릉 혼유석

이는 건원릉의 예를 잠깐 따른 것으로, 휘릉 이후의 왕릉에는 다시 고석을 4개씩 배치했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배치됐다. 휘릉 정자각은 다른 왕릉의 정자각과 달리 정전의 양 옆에 익랑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했다.

1688년(숙종 14년)에 장렬왕후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장렬왕후(莊烈王后) 이야기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두른 휘릉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1624~1688)는 본관이 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씨의 딸로 1624년(인조 2년)에 직산현(충남 천안) 관아에서 태어났다.

1635년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38년(인조 16년)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됐다.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자의왕대비가 됐으며,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살아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그 후 1688년(숙종 14년)에 창경궁 내반원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로 간택된 장렬왕후는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자의왕대비라는 호칭으로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휘릉  문석인

그러나 본의 아니게 복제와 예송의 대상이 돼 서인과 남인의 붕당 싸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상복입는 기간을 놓고 두 번의 당쟁 일어나

성리학에 근거한 상례에 따르면 장자(맏아들)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자 이하의 상에는 기년복(1년)을 입도록 돼 있다. 1659년(효종 10년)에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왕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된다.

이 사건을 제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이라고 하는데, 이 때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이기 때문에 기년복을 주장했고, 남인은 효종이 인조의 장자는 아니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의 대우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대립한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기년복을 입게 한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는 것으로 결말지어졌고, 이로 인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서인이 승리해 정권을 잡게 됐다.

그 후 15년 뒤인 1674년(현종 15년)에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를 제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인은 인선왕후가 인조의 둘째며느리이기 때문에 대공복(9개월)을 주장했고, 남인은 왕비였기 때문에 첫째며느리의 대우로 하여 기년복(1년)을 주장했다.

이 때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채택해 서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남인 정권이 세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자료,사진출처=문화재청,조선왕릉관리소,공공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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