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 문성군부인 광해군묘(光海君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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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 문성군부인 광해군묘(光海君墓)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8.0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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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광해군묘는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류씨의 묘소이다. 묘소는 왕자 묘제의 예로 조성됐다.

묘의 형식

광해군묘, 다른 능침과 달리 묘에 두른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민묘이다. 사진=문화재청

묘는 쌍분의 형태로 조성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혼유석을 배치했다.

앞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이 광해군묘, 오른쪽이 문성군부인묘소로 각 봉분 앞에는 묘표석을 세웠다. 묘소 밑에는 재실터로 추정되는 주춧돌이 있다.

묘의 역사

보기에 따라 울고 있는듯한 표정의 광해군묘 문석인

1623년(인조 1년)에 문성군부인 류씨가 강화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같은해 양주 적성동 (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먼저 묘소를 조성했다. 이후 1641년(인조 19년)에 광해군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10월 4일에 문성군부인 묘 우측에 묘소를 조성했다.

광해군(光海君) 이야기

광해군(1575~1641)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1575년(선조 8년)에 태어났다. 광해군에 책봉된 후,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로 책봉됐다.

왕세자가 된 후엔 남도로 내려가 왜군을 무찔러 왜란의 승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왜란이 종결된 후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인목왕후가 간택 된 후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왕세자의 지위가 위협 받기도 했으나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의 복구사업에 전념했다. 창덕궁을 비롯한 궁궐과 종묘사직을 중건했고,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다시 간행했으며,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해 민생안정에 힘 썼다.

혼이 나와서 노닌다는 혼유석과는 달리 상석으로 불리우는 광해군묘 상석

또 당시 명나라와 후금(청)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외교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에 대한 불안감으로 친형 임해군을 죽였고, 붕당정치에 휘말려 계축옥사 등의 여러 역모사건으로 광해군을 배척한 세력(소북)과 영창대군을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인목왕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시키기도 했다. 이런 상황속에 폐모살제와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들이 1623년에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성공하게 되자 광해군은 왕위에서 폐위됐다.

이후 강화도에 유배됐다가 제주도로 옮겨졌고, 1641년(인조 19년)에 제주도 유배지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이야기

단촐한 크기의 광해군묘 장명등

문성군부인 류씨(1576~1623)는 본관이 문화인 문양부원군 류자신과 봉원부부인 정씨의 딸로 1576년(선조 9년)에 태어나, 선조의 왕자 광해군과 결혼해 문성군부인에 봉해졌다.

1592년(선조 25년)에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에 책봉됐고, 1608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광해군 사이에서 3남을 낳았으며, 1622년(광해 14년)에 광해군의 외교정책의 잘못을 지적한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문성군부인으로 강봉되어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같은 해에 강화도 유배지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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